[7권] Part 04 - Chapter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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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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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4. 길을  찾아서  

Chapter 34. 영적 추수기에 즈음하여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해마다 우리는 이날을 기념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영, 육 아울러 축복 받은 고마움에 대해 특별히 감사의 예배를 올려 왔습니다. 추수감사절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광야의 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오래간만에 농사를 지어 거둔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를 올린 데서 비롯됩니다.

 

당시에는 곡식을 모아 저장한다고 해서 수장절(收藏節)이라고 불렀으며, 초막을 짓고 광야 생활을 기념한다고 해서 초막절(草幕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처음으로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과 감개가 컸을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로 연명하면서 이런 제사를 드리지 못하다가, 십 년 만에 처음 손수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추수감사절은 오늘날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베풀어주신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인 동시에, 또한 시대적으로 주께서 내려 주시는 특별한 영의 양식에 대한 감사 예배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60, 3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13:3-8)

 

이것은 누구나 아는 말씀이지만, 그 깊은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육적으로 해석하면 거의 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의 말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인생의 추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과 곡식을 거두는 사람이 같은 농부지만, 인생의 추수, 곧 영적인 수확은 성경 상 씨를 뿌리는 자와 알곡을 거두는 자가 각각 다릅니다. 두 감람나무의 사명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뿌리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거두는 역할을 합니다.

 

뿌리는 역사에서는 아무데나 일단 마구 뿌려놓지만, 거두는 역사에서는 알곡만 골라서 거둬들입니다. 이때 거두는 도구를 성경에서는 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14:17) 뿌리는 역사에서는 이 낫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낫을 든 자가 단수(單數)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전에 이상 중에 밤나무 밭에 가서, 익어서 땅에 떨어진 밤을 광주리에 골라 담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한 적이 있습니다. 광주리에 담으려면 밤이 익어야 합니다. 즉 익지 않은 밤은 광주리에 담을 수 없습니다.

 

설사 내 맘대로 광주리에 주워 담아 천국 곳간에 들여놓으려고 해도 하늘에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의 가장 큰 고충이 여기 있습니다. 한 솥 밥을 먹으면서 같이 고생했는데, 누구는 주 앞에 서고, 누구는 못 선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런 일은 없어야 하며, 또 없도록 피차에 힘써야겠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을 나무로 비유하여 신앙의 척도를 말씀드리자면, 어떤 나무는 덩치는 큰데 열매가 달리지 않고, 어떤 나무는 아주 작지만 열매가 다닥다닥 달려 있고, 또 어떤 나무는 가시밭에서 잘 자라지 못하고, 어떤 나무는 겉은 멀쩡한데 속이 썩어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들을 모두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이며, 그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이런 말은 물론 우리의 섭리 안에 부름을 받은 여러분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뿌리는 역사와 거두는 역사는 당연히 긴밀한 함수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인 하나님의 두 종 가운데 전자는 조만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양자 사이는 원만치 못할 정도가 아니라 최악의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일로, 성경을 새삼스럽게 인용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역사에는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각자 갈 데로 가게 마련인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앞선 종의 신상에는 금년 하반기에 와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의 입술이 비정상으로 움직여 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렇게 열렬히 십자가와 보혈과 부활을 증거하던 분이 어떻게,” 하고 귀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일도 하나님의 역사에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이라는 라이벌(경쟁자)이 없었던들, 점을 치러 무당을 찾아가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삼상28:8 이하 참조)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삼상18:10) 이것은 비단 구약 시대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뿌리는 역사는 일하기 쉽고, 거두는 역사는 일하기 무척 어렵습니다. 전자는 은혜를 끼쳐서 모아들이기만 하면 되지만, 후자는 다듬어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분이 모자라는 나무는 물을 대어 줘야하고, 병든 나무는 고쳐 줘야 하며, 가시밭에서 자라는 나무는 옮겨 심는 등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역사와 거두는 역사는 양상이 전혀 다릅니다.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어라.’”(14:14) 본문 말씀대로, 거두는 역사는 성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역사가 시작된 청량리 시절의 셋방 성전에서 앞으로 지어질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가 계신 것입니다. 거두는 역사에서는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 동안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뿌리가 깊이 박혀’(14:5) 주 앞에 설 수 있는 자의 수가 35명 배출되었다고 보여주셨지만, 이 수는 앞으로 급속도로 많이 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수는 그때그때 당연히 주의 종에게 통고가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니”(3:12) 하는 말씀이 응해지는 것입니다.

 

앞선 역사처럼 제1, 2, 3의 울타리(신앙촌)를 만들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가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하늘 군병을 배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은혜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