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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6.04.18본문
Part 04. 길을 찾아서
Chapter 37.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에는 빛과 어둠의 싸움이 조금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고금에 성경만큼 정직한 글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인 내용이나, 아름답게 꾸민 대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잘한 일과 못한 점이 그대로 기록되어, 읽는 사람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단 것과 쓴 것을 먹어 육의 생명이 유지되듯이,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장점과 단점을 거울삼아 영의 생명이 자라게 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때와 불영광을 돌렸을 때, 하나님과 가까워졌을 때와 멀어졌을 때, 하나님을 기쁘게 했을 때와 노엽게 했을 때가 그대로 기록되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인간이 교류한 기록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만으로는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이에 따르는 부작용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인간의 생각을 앞세워 성경을 부분적으로 풀이할 때 이런 폐단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오랫동안 신학자들 사이에는 노아의 홍수가 사실이냐, 전설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을 해오다가, 몇 해 전에 아라랏산 위에서 방주의 파편으로 생각되는 유물이 발견되어 사실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을 정도로 인간의 지각은 매우 미흡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행적에 대해서도 논평이 구구합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노아를 무능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종으로서 오랫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을 텐데, 자기 식구밖에 건지지 못했으니, 언뜻 생각하면 무능한 사람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한 것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여’ 인간을 쓸어버리고 노아의 일가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전도하여 남들을 방주 속에 인도해 들인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운 하나님의 일면을 보고 놀라기에 앞서 하나님의 근본 의도가 어디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하와가 마귀의 꼬임에 빠진 후로 어떻게 해서든지 흠과 티가 없는 당신의 백성을 되찾아 마귀를 소탕하는 역군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노아는 전도에 힘쓰는 종이 아닙니다. 그는 묵묵히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지어 자기 가족을 건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때 노아가 섣불리 이웃을 사랑하여,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방주 속에 불러들이거나, 인간의 지혜를 내세워 3층으로 지으라는 방주를 4층이나 5층으로 짓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좇아야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인간이 자기 재량으로 일하려고 하면 백 번 다 실패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지상에서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섭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이것은 땅에 오신 주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미리 짜 놓으신 각본대로 움직이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대적하는 무리들이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에도 주님은 묵묵히 예정된 당신의 길을 따랐으며, 오히려 저들을 위해 도했습니다. 즉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각본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종을 택할 때 그 종의 행동반경(行動半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테두리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다면 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지시는 끊어집니다. 그러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앞세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공경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 신을 섬기게 된 동기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럴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과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법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 이세벨의 꼬임에 쉽사리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건 바알 신을 섬기건 그게 그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합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바알 신을 섬겼던 것입니다. 임금이 이 모양인데다가 이세벨이 권력과 금력을 동원하여 매수공작을 벌이는 바람에 많은 제사장들이 차츰 개종하게 되고, 백성들도 호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에서는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 엘리야였습니다.(왕상21:29 참조) 아합의 범죄는 하나님의 역사를 비뚤게 인도한 데 있습니다. 그가 차라리 하나님을 부정했던들, 그 죄는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당찮게 하나님을 바알에게 접붙여 많은 사람을 곁길로 인도하는 큰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동기에서 엄청난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마귀의 수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실패하는 원인이 여기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도 뒤끝이 좋지 않은 것이 상례인데,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여건이 나아지면 자기 마음대로 각본을 짜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눈 밖에 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다윗이나 솔로몬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명령 하나면 안 되는 일이 없게 되자, 자기 생각을 앞세워 행동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빠지기 쉬운 커다란 함정의 하나입니다.
앞선 하나님의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출발은 화려했으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주의 종으로서 제일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태도만은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오랫동안 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한동안 세상일을 하였으나, 믿음 하나만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연예계에 발을 적셨을 때에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예컨대 담배 한 가치, 맥주 한 모금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눈에 잘 보였다면 아마 이런 점들이 이유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셋방살이로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착착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교인이 적건 많건 나는 주의 종으로서 한결같이 모든 정성을 쏟아 왔습니다. 그 동안에 내 생각을 앞세운 적은 없습니다. 성전을 짓고 심지어 버스, 영사기를 마련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주의 지시에 충실히 따라 왔습니다.
우리 역사를 좀 더 급속히 발전시킬 수 있는 인위적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또 해봤자 성과를 올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를 앞세우고, 우리는 여기에 충실히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될 듯한 일도 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될 듯한 일도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