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Part 03 - Chapter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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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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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믿음의 푯대를 굳게 잡고

Chapter 26. 하나님의 역사와 이적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이적과 기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적, 기사에 신기함과 놀라움, 그리고 두려움까지도 느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적, 기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보여 주시는 권능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대 비상시에 처했을 적마다 하나님은 초인간적인 권능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신, 구약 시대에 각각 두 차례씩 들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동시킬 때와, 당신의 백성이 이교도의 침입으로 큰 위기를 맞았을 때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창시할 때와 감람나무의 역사를 베풀 때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주님과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오늘날 이 땅에서 두 증인을 통하여 나타낸 이적, 기사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때인 만큼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역사가 무엇인가를 뭇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밖에 나타난 이적과 기사 자체에만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적, 기사를 베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지못한 일종의 비상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되도록 조용한 가운데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모세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모세를 대하는 애굽 왕의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모세가 당신의 사자임을 입증해 보여주기 위해 열 가지 이적을 행하게 하여, 드디어 전 애굽에 송장 냄새가 풍겨오게 하자 할 수 없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국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준 이적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그의 지시에 잘 순종했던들 모세가 행한 이적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므리바의 물가에서 목이 마르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모세를 원망하는 바람에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했으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는 통에 메추라기를 바람에 날려 보냈던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이 얼마나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으면 하나님께서 보다 못해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저들을 해치게 하셨겠습니까?(21:5)

 

하나님께서 이적, 기사를 즐겨 행하시는 줄 알아서는 오산입니다. 이적, 기사를 많이 행할수록 조건이 하나님 편에 불리한 것입니다. 당신의 종이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당신의 역사가 애로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은 마지못해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애로를 타개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따르면서도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을 일삼아 왔기 때문에 무려 40년이나 광야를 헤매면서 무수한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으며, 끝내는 고생만 하다가 모세를 위시하여 저들은 광야에 묻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모세의 말에 고분고분 잘 따라 주었던들 모세는 저들을 이끌고 예정된 기일 안에 복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사례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영도자와 추종자의 호흡이 맞지 않을 때 함께 죽는다는 산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적과 기사의 근본 취지는 주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많은 이적, 기사도 백성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따르는 백성들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곧바로 인정하고 자기의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였던들 구태여 이적과 기사를 보여 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일반 백성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까지도 주님을 한 선지자로 간주하기는 쉬웠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5:3-5)

 

이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바다에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이적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라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선생이 되고도 남을 테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선생님의 말씀이니까 예의상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선생의 말씀이지, 하나님의 아들의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나마 주님을 선생님으로 깍듯이 대접하여 말씀대로 그물을 쳤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베드로의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습니까? 고기잡이에 도가 튼 저들이 밤을 세워가면서 그물을 던져도 잡히지 않는 고기를 대낮에 잡으라고 목수의 아들이 지시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그물이 찢어지게 잡혀 두 배를 고기로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주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불찰을 뉘우치고 두려운 나머지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아뢰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적에 대한 영적인 차원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베드로나 주위 사람들이 그때 주님을 곧 하나님의 아들로 맞아들여 순종했던들 주님은 구태여 이런 이적을 저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권능을 눈으로 보지 않고 말씀만으로 목수의 아들을 대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놀라운 이적, 기사를 보여줘도 선지자와 혼동하여 사뭇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끝내는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육을 가진 인간이 영의 세계를 이해하기란 이토록 벅찬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시하여 역대의 선지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영적인 영도자의 존재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런 점에서 전혀 애로를 느끼지 않은 것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위세가 당당한 그가 광야에서 외치자 사람들은 그 위세에 눌려 구세주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릴 정도였으므로, 자기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하나님의 종임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구태여 이적을 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옥중에 갇혀서 자기를 얼른 빼내 주지 않는 주님을 원망하다가 의심하여 자기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떨어지기는 했으나, 태어난 가문과 타고난 풍모만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으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 이적과 기사를 얼마든지 행할 수 있었으나 말씀을 전하는 데 그쳤던 것입니다.

 

내가 이 역사를 청량리에서 처음 시작할 때 모인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속으로 앞선 역사의 초창기와 같이 향취가 진동하고,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이슬이 쏟아져 내리는 등, 은혜의 창파 속에 젖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는 아닙니다.

 

누구나 초인간적인 신비로운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깊이 깨닫는 계기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되도록 조용한 가운데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역사가 당신께서 일으킨 역사임을 보여주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동안 말씀으로 혹은 적지 않은 이적과 기사로 하늘에서는 여러분에게 할 도리를 다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겪고 들어서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의심하고 이 역사를 부인하여, 주의 종이 하나님을 향해, “저를 따르는 사람들이 의심하고 잘 순종치 않으니 더욱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면 이것은 피차에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부름을 받은 여러분은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