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6.08.17본문
Part 05. 섭리 안에서
Chapter 42. 영의 아버지와 육의 아버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죄를 씻어 주고 믿음을 키워 주고 영계와 교통을 하게 하여, 땅에 속한 여러분을 하늘에 속하게 하는, 놀랍고도 고마운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너나없이 성령을 받기를 원하고, 또 성령을 받기 위해 무척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 중에는 어떻게 해야 그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부흥회를 쫓아다니고,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고, 심지어 몇 주일씩 침식을 잊고 간구하기도 합니다. 그 정성과 열의와 끈기는 실로 가상하고 갸륵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써도 그들은 끝내 원하는 성령은 감감 소식이어서 받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받기는 받았는데 이상한 것을 받아가지고 혼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경우가 세상에는 종종 있습니다.
그 단적인 한 예가 소위 방언(方言)입니다. 나는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차례 말씀드렸으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방언뿐만 아니라 기도에 열중하다가 몽롱한 가운데 이상한 환상을 보거나 특이한 느낌을 받으면 곧 성령의 역사로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줄 알고 좋아합니다.
소위 말하는 신령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경우를 흔히 불 수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을 외워도 이상한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아도 이것과 그것이 어떻게 다르며, 그 특징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노력 끝에 엉뚱한 것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은혜 체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능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만일 성령을 받는 것이 오직 노력의 대가라면 막말로 땀 흘려 일하고 품삯을 두둑이 받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성령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인간이 노력을 내세워 자랑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노력 않고 낮잠만 자도 성령이 저절로 오느냐 하면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행위보다 은혜가 앞섭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것부터가 은혜입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나 지식의 대가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선량한 행동을 신성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지, 하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라도 하나님과 선이 닿아 있지 않을 때 그것은 개인적인 가치에 그칩니다.
문제는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돈독했기 때문에 당신의 종으로 삼은 것이지,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쓸 만한 그릇이라고 인정될 때 하나님께서 부르는 것입니다.
선행이나 공로보다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의 여부를 하나님은 먼저 염두에 두십니다. 그러기에 수십 년 열심히 매달려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별로 매달리는 것 같지 않는데 큰 축복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인이 우러러보아도 주님의 눈에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주야로 울부짖으며 열심히 기도하는 자세도 귀하지만, 구하기 전에 주시도록 하는 신앙 자세가 소중한 것입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면 하나마나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오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오게끔 우리는 주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춰야 할 첫째 요건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요건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충분한 요건을 갖출 수 있을까요? 신도 100만이 모여 철야해가면서 기도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건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되어야 하며, 또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성령 받기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을 만한 여건은 어떻게 해야 조성할 수 있을까요? 성령은 하늘의 것이지 땅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땅에 성령을 내려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인간이 마음대로 조성할 수 없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하나님의 인휼함을 입을 수 있는 시대이며,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특별한 은총을 내려 주시고 불꽃같이 살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의 섭리 안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2천 년 전에 흘리신 주의 피가 생수로 화하여 여러분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즉 안찰에 의해 쉽사리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생수에 의해 심령이 정결해질 수 있고, 기도에 의해 은혜의 연결을 쉽사리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애써서 되는 일이 아니고, 때를 잘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에 어떤 신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신부는 매우 경건한 생활을 한 선량하고 성실한 분입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그 시신도 아름답게 되어 있을 줄 알고 가 보았더니 그 모습이 몹시 흉하여 실망하게 됩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과연 그럴 수밖에 없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고 있는 성령의 은총은 모두가 보혈의 공로에 의해 비롯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육적인 자범죄 밖에 씻지 못하던 구약 시대와는 달라서, 주의 피로 말미암은 생수는 원죄와 유전죄도 씻어 맑힐 수 있습니다. 영은 하늘에 속한 것이므로 하늘의 존재인 주의 피가 아니고서는 정결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핏속에 있으며, 따라서 피가 정결해지면 영이 맑아지고, 피가 불결하면 영도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피를 움직이는 것은 영이며, 피가 정지되면 영은 떠납니다. 이때 성령이 주관하는 영과 악령이 주관하는 영은 각각 가는 곳이 다릅니다. 하나는 지성소로, 하나는 음부로 떠납니다.
부모로부터 더러운 피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 일생 죄 안 짓고 살아도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피를 주의 피로 깨끗이 씻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수양에 힘쓰면 어느 정도 마음이 선해질 수 있지만 영은 씻어지지 않습니다. 피 자체를 맑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의 피로 씻음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을 때에만 영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이 새로워지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호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땅의 백성에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말입니다. 그는 육적인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의 아들로 탈바꿈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불사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보혈은 보혜사 성령으로 임하여 우리의 더러운 피를 정결케 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영광된 새 생명을 얻게 합니다. 실로 놀랍고도 고마운 하늘의 은총입니다. 이 경우에 성령의 은혜는 이를테면 오염된 피의 해독제입니다.
이 성령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받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디서나,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도 시대에 오순절 날 120문도에게 불과 같은 성령이 처음 내린 후로 2천 년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役事)를 크게 부흥시키기 위해 전 세계의 곳곳에서 간간이 내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기나긴 2천 년 역사에서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한 한 증거의 성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는 이긴자 감람나무를 통하여 세 증거의 성령의 은총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저 오순절 이후 2천 년에 걸쳐서 내린 성령의 역사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엄청난 놀라운 은총입니다.
내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이 역사에 동참한 여러분은 그 동안의 은혜 체험으로 잘 아실 것입니다. 기독교사상 어느 시대에도, 그리고 어떤 고장에도 이런 성령의 역사는 없었으며, 또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란 요컨대 주의 피로 죄를 씻는 종교입니다. 이 죄를 씻어 주는 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를 원하고, 또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고, 연보하는 이 모든 노력은 결국 성령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차츰 자기를 정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나날이 주님에게 가까워지는 생활 ― 오늘은 어제보다 가까워지고, 내일은 오늘보다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언제나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혹은 뒷걸음을 친다면 한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감천만이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적이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면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내가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줄 때에도 이것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하게 안찰하여 여러분의 골수에 박힌 모든 죄를 한꺼번에 깨끗이 도말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기보다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뒷감당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여 다시 죄에 물들었을 때 악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어떤 사람은 40%, 어떤 사람은 50%씩 서서히 도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음란죄입니다. 다른 죄는 몸밖에 있으나 음란죄는 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을 간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성령을 간직하는 비결은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즉 생각과 감정이 언제나 주님을 향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하고 있으면 마귀는 결코 틈탈 수 없습니다.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생활 ― 이것이 참된 성도의 생활입니다.



